고객 120개사를 관리하면서 개인화할 수 없다는 죄책감
- 14 Dec, 2025
120개사의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
오늘 아침 9시 23분. 고객사 ‘블루밍 필라테스’에서 문의가 왔다. “예약 시스템 화면에 저희 로고 넣을 수 있나요?”
나는 알고 있다. 이 업체가 5개월 전에 가입했다는 것. 월 3만원 플랜을 쓴다는 것. 그런데 몰랐다. 이 대표님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어떤 동네에서 운영하는지도.
120개사다. 내 SaaS를 쓰는 고객이. 2년 전 10개사였을 때는 달랐다. 각자 이름도 알고, 무슨 업종인지도 알고, 어떤 고민으로 가입했는지도 기억했다. 지금은 노션 데이터베이스 없이는 구분이 안 된다.

템플릿 답변을 보낼 때마다
“안녕하세요, 윤솔로입니다. 문의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문장을 오늘 17번 복붙했다.
각 고객마다 다른 이야기를 써주고 싶다. “필라테스 회원 관리 힘드시죠? 저희 시스템이 도움 됐으면 좋겠어요” 이런 식으로. 근데 그러려면 오전이 다 간다. 오후에 개발할 시간이 없어진다.
그래서 만들었다. ‘자주 묻는 질문’ 노션 페이지. Ctrl+C, Ctrl+V. 효율적이다. 고객은 빠르게 답을 받는다. 나는 시간을 아낀다.
근데 죄책감이 온다.
이 사람은 내 SaaS에 매달 돈을 낸다. 3만원이든 5만원이든. 그 돈으로 나는 월세를 낸다. 근데 나는 이 사람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한다. 템플릿 답변을 보낸다.
“효율”이라는 이름의 냉정함이다.

스케일업 vs 관계
트위터에서 봤다. “1000명의 팬보다 100명의 진짜 팬이 낫다.” 맞는 말이다. 근데 현실은 다르다.
120개사가 각각 월 3만원씩 내면 360만원이다. 30개사가 월 10만원씩 내도 300만원이다. 숫자상으론 비슷하다. 근데 30개사는 관리가 된다. 120개사는 안 된다.
나는 고민했다. ‘프리미엄 플랜 만들까?’ 월 15만원. 1:1 세팅 도와주고, 매달 30분 컨설팅 전화하고. 근데 그러면 개발 시간이 더 없어진다.
결국 선택했다. 스케일. 더 많은 고객. 더 적은 관여. ‘셀프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진짜 이유는 다르다. 내가 120명을 케어할 수 없다.
오늘 어떤 고객이 메일을 보냈다. “처음 가입했을 때 솔로님이 직접 전화 주셨는데, 요즘은 답장도 늦으시네요.”
찔렸다. 2년 전 그 고객이다. 10개사 시절. 나는 모든 신규 고객에게 전화했다. “어떻게 쓰실 건지 들어보고 세팅 도와드릴게요.” 지금은 온보딩 가이드 링크만 보낸다.
성장의 대가다.
개인화는 사치인가
어제 밤 11시. 유튜브로 Y Combinator 영상 봤다. “Don’t do things that don’t scale.” 초기에는 고객 한 명 한 명 직접 만나라고.
근데 다음 영상은 달랐다. “Automation is key.” 자동화하라고. 시간을 아껴라고.
모순이다.
나는 중간에 끼었다. 120개사는 ‘초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스케일업’ 단계도 아니다. 직원 0명인데 무슨 스케일업.
개인화는 사치가 됐다.
예전엔 고객 이름 불러가며 답장했다. “민수님, 헬스장 회원 늘어나셨다니 축하드려요!” 지금은 “고객님”이다. 노션에서 복붙한 답변이다.
죄책감의 정체는 이거다. 나는 ‘관계’를 팔고 싶었다. 근데 지금은 ‘시스템’을 팔고 있다. 고객은 숫자가 됐다.

새벽 3시의 변명
잠이 안 온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나는 나쁜 창업가인가?”
아니다. 합리화한다.
120개사에 템플릿 답변 보내는 게 10개사에 개인 답변 보내는 것보다 낫다. 더 많은 사람이 도움받는다. 효율이 정의다.
근데 속으론 안다. 나는 그냥 시간이 없다. 혼자서 개발하고, CS하고, 마케팅한다. 개인화할 여유가 없다.
‘개인화’는 여유의 산물이다.
직원 있으면 다르다. “CS팀장님, 이 고객 특별히 챙겨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된다. 나는 혼자다. 내가 CS팀이고, 개발팀이고, 마케터다.
새벽 3시 25분. 노션 켰다. ‘고객 관리 아이디어’ 페이지 만들었다.
- 분기마다 ‘고객 인터뷰’ 5개사씩
- 생일 축하 자동 메일 (쿠폰 10%)
- 1년 넘은 고객에게 손편지
적고 보니 또 죄책감이다. 이것도 ‘효율적 개인화’다. 진짜 개인화가 아니다. 시스템화된 친밀감이다.
트레이드오프를 인정하는 날
오늘 오후 2시. ‘블루밍 필라테스’ 대표님께 답장 보냈다.
“안녕하세요, 로고 커스터마이징은 엔터프라이즈 플랜(월 20만원)에서 가능합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별도 상담 도와드릴게요.”
템플릿이다. 근데 마지막 줄을 추가했다.
“5개월간 저희 시스템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라테스 회원 관리에 도움 됐으면 좋겠어요.”
5초 더 걸렸다. 노션에서 가입일 확인하고, 업종 확인하고.
120개사 다 이렇게는 못 한다. 근데 오늘 문의 온 5개사는 할 수 있다.
완벽한 개인화는 불가능하다. 근데 0%와 30% 사이엔 차이가 있다.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120명 모두를 깊이 알 수 없다. 근데 오늘 만난 5명은 조금 더 알 수 있다.
죄책감은 남는다. 근데 현실도 있다.
스케일과 인정. 둘 다는 못 가진다. 중간 지점을 찾는 수밖에.
혼자 하는 사람의 한계
트위터에 올렸다.
“120개사를 한 명이 관리하면서 느끼는 거: 개인화는 사치가 아니라 자원의 문제다. 미안하다고 느끼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15분 만에 답글 12개 달렸다.
“저도요, 고객 200명인데 이름 반도 몰라요.” “팀 있어도 힘든데 혼자는 진짜…” “그래도 솔로님은 답장이라도 빨리 주시잖아요.”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솔로프리너의 숙명이다. 모든 걸 할 순 없다. 우선순위를 정한다. 오늘은 개발, 내일은 CS, 모레는 마케팅. 개인화는 그 틈새다.
직원 뽑으면 다를까?
아마 다르다. 근데 지금은 MRR 350만원이다. 인건비 낼 여유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분 나누기도 싫다.
혼자의 자유를 선택했다. 대가는 이거다. 120개사를 개인적으로 챙길 수 없다는 죄책감.
트레이드오프다. 받아들인다.
내일도 템플릿을 쓸 것이다
오늘 CS 17건 처리했다. 그중 5건은 개인화했다. 12건은 템플릿이다.
30% 개인화. 나쁘지 않다.
내일도 비슷할 것이다. 모레도. 120개사가 200개사 되면 더 낮아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시스템을 만든다. 120개사가 예약을 관리한다. 내 시스템으로. 그들의 고객은 수천 명이다. 간접적으로 나는 수천 명을 돕는다.
개인화는 못 해줘도, 작동하는 시스템은 준다.
완벽한 창업가는 없다. 혼자 하는 창업가는 더더욱.
죄책감은 계속될 것이다. 근데 일은 계속된다.
120명 모두를 사랑할 순 없다. 근데 120명 모두가 쓸 시스템은 만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