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피드백을 바로바로 반영했더니 번아웃이 왔다
- 09 Dec, 2025
고객 피드백을 바로바로 반영했더니 번아웃이 왔다
피드백은 축복이자 저주다
고객이 의견을 준다는 건 좋은 신호다. 관심 있다는 뜻이니까.
근데 나는 여기서 실수했다. 전부 다 들었다.
“이 기능 추가해주세요”라고 하면 바로 노션에 적었다. “이 버튼 위치가 불편해요”라고 하면 당일에 고쳤다. “이거 안 되는데요?”라고 하면 밤늦게까지 디버깅했다.
120개 고객사가 있으니 하루에 피드백이 5~10개는 들어온다. 다 중요해 보였다. 다 급해 보였다.
6개월 동안 이렇게 일했다. MRR은 350만원까지 올랐다. 고객 만족도도 높았다. CS 응답 속도는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근데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로드맵이 없어졌다
처음엔 로드맵이 있었다.
Q1: 결제 시스템 고도화 Q2: 모바일 앱 출시 Q3: API 오픈 Q4: 리포팅 기능 강화
이게 내 계획이었다. 2년 안에 MRR 1000만원 목표로 짠 전략이었다.
근데 고객 피드백을 듣다 보니 로드맵이 흔들렸다.
“엑셀 내보내기 기능 급해요”라는 피드백이 들어왔다. 원래 Q4 계획이었는데 당겨서 만들었다.
“카카오톡 알림 연동해주세요”라는 요청이 3개 업체에서 왔다. 로드맵엔 없었는데 급하게 추가했다.
“예약 취소 시 환불 프로세스가 복잡해요”라는 불만이 있었다. 결제 시스템 고도화보다 이걸 먼저 손봤다.
6개월 지나니까 로드맵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더라.
Q2 모바일 앱은? 못 만들었다. API 오픈은? 계획만 있다. 리포팅 기능은? 기초만 있고 고도화는 안 됐다.
대신 잡다한 기능이 30개 늘었다. 엑셀 내보내기, 카카오톡 연동, 환불 프로세스, SMS 자동 발송, 대시보드 커스터마이징, 다국어 지원 베타…
고객은 만족했다. 근데 제품은 산으로 갔다.

에너지가 분산됐다
혼자 일하면 에너지가 제한적이다.
하루에 집중 가능한 시간은 6시간 정도다. 나머지는 CS, 잡무, 휴식이다.
이 6시간을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하다. 전략적으로 써야 한다.
근데 나는 이 시간을 피드백 대응에 다 썼다.
월요일: 엑셀 내보내기 버그 수정 (3시간) 화요일: 카카오톡 알림 테스트 (4시간) 수요일: 고객사 A 커스텀 요청 대응 (5시간) 목요일: 환불 프로세스 UI 개선 (3시간) 금요일: SMS 발송 오류 디버깅 (6시간)
한 주가 이렇게 갔다. 핵심 기능 개발은? 한 줄도 못 썼다.
에너지가 쪼개지니까 깊은 집중이 안 됐다. 매일 다른 일을 하니까 맥락 전환 비용이 컸다. 아침에 뭘 할지 계획 세우는 것도 피곤했다.
‘오늘은 뭐 하지? 어제 못 끝낸 SMS 버그? 아니면 새로 들어온 대시보드 요청?’
매일 이랬다. 주도권이 없었다. 고객이 일정을 짰다.
우선순위가 없어졌다
피드백이 들어오면 다 똑같아 보인다. 긴급해 보인다.
“이거 없으면 못 써요” “경쟁사엔 있는데 여기엔 없네요” “이 버그 때문에 업무가 막혔어요”
다 중요하다. 다 급하다. 근데 전부 다 할 수는 없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데, 기준이 없었다.
소리 큰 고객 먼저? 아니다. 매출 큰 고객 먼저? 그것도 애매하다. 빠르게 할 수 있는 것 먼저? 그럼 중요한 건 계속 밀린다.
결국 ‘감’으로 정했다. 그날그날 기분으로 정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전략이 없으니 에너지가 낭비됐다.
6개월 일했는데 핵심 기능은 하나도 안 늘었다. 잡기능만 30개 늘었다. 고객은 만족하는데 제품 경쟁력은 안 올랐다.
MRR은 350만원에서 멈췄다. 더 이상 안 늘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차별화 포인트가 없으니까.
고객이 원하는 걸 다 만들어줬는데, 정작 신규 고객을 끌어들일 만한 강점은 없었다.

번아웃은 갑자기 왔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하기 싫었다.
노트북 키기가 싫었다. 슬랙 알림 보기가 싫었다. 고객 문의 답하기가 싫었다.
‘오늘도 누가 뭘 요청하겠지. 또 급하다고 하겠지. 또 밤늦게까지 일하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두려웠다.
번아웃이었다. 6개월 동안 쌓인 피로가 한 번에 왔다.
증상은 명확했다:
- 집중이 안 됨 (30분마다 유튜브)
- 의욕이 없음 (코드 한 줄이 산)
- 짜증이 많아짐 (고객 문의가 귀찮음)
- 죄책감이 듦 (일 안 하면 불안)
- 잠을 못 잠 (머릿속에 할 일 목록)
2주 동안 거의 일을 못 했다. CS는 최소한만 했다. 개발은 손도 못 댔다.
이러다 회사 망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회사는 안 망했다.
고객들은 이해해줬다. “사장님 쉬세요”라는 답장도 왔다. 기능 요청도 줄었다. 아니, 내가 안 봤다.
2주 쉬고 나니까 깨달았다. 내가 과하게 반응했구나.
다시 주도권을 찾는 법
번아웃 후에 일하는 방식을 바꿨다.
1. 피드백 모으는 시스템
예전엔 피드백이 오면 바로 반응했다. 슬랙으로 오든 이메일로 오든 즉시 답했다.
이제는 노션에 모은다. “피드백 인박스” 페이지를 만들었다.
고객이 요청하면 “확인했습니다. 검토 후 답변드릴게요”라고만 답한다. 바로 안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 오후에 모아서 본다. 그때 우선순위를 정한다.
2. 우선순위 매트릭스
피드백을 4개 카테고리로 나눈다:
- 임팩트 큼 + 노력 적음 → 이번 주에 함
- 임팩트 큼 + 노력 큼 → 로드맵에 추가
- 임팩트 작음 + 노력 적음 → 여유 있을 때
- 임팩트 작음 + 노력 큼 → 안 함
냉정하게 판단한다. 안 하는 것도 결정이다.
3. 로드맵 복원
분기별 목표를 다시 세웠다.
Q3: 모바일 앱 출시 (미뤘던 거) Q4: API 오픈 (이것도 미뤘던 거)
고객 피드백은? 주 단위로 1~2개만 선택해서 반영한다. 로드맵 진행에 방해 안 되는 선에서만.
4. 고객 교육
“요청하면 바로 해준다”는 기대를 낮췄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다음 업데이트 때 검토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기대치를 관리하니까 나도 편하고 고객도 이해한다.
실제로 불만 없다. 오히려 “천천히 하셔도 돼요”라는 답이 온다.
5. 집중 시간 확보
아침 9시~12시는 개발만 한다. CS 안 본다. 슬랙 끈다.
오후 2시~4시는 피드백 대응, CS, 잡무.
저녁은 마케팅, SNS, 공부.
시간을 나누니까 에너지 분산이 덜하다.
고객 중심은 맞는데, 고객이 전부는 아니다
고객 피드백은 중요하다. 듣지 않으면 방향을 잃는다.
근데 전부 들으면 나를 잃는다.
고객은 자기 문제만 본다. 당연하다. 내 제품의 큰 그림은 내가 봐야 한다.
“이 기능 추가해주세요”라는 요청 10개 들어주는 것보다, 핵심 기능 1개 제대로 만드는 게 낫다.
고객이 원하는 건 결국 “문제 해결”이다. 내가 요청받은 기능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러려면 내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피드백은 듣되, 우선순위는 내가 정한다. 고객은 존중하되, 로드맵은 내가 짠다. 빠르게 반응하되, 전략적으로 움직인다.
이게 1인 창업가가 살아남는 법이다.
지금은 어떤가
요즘은 훨씬 낫다.
피드백은 여전히 들어온다. 근데 바로 안 한다. 모아뒀다가 판단한다.
로드맵대로 일한다. Q3 목표인 모바일 앱 개발 중이다. 진행률 60%.
고객 만족도는? 여전히 높다. 응답 속도는 느려졌는데 불만은 없다.
MRR은? 380만원. 천천히 오르고 있다. 핵심 기능에 집중하니까 신규 고객 전환율이 올랐다.
번아웃은? 아직 안 왔다. 일하는 게 다시 재밌다.
고객 목소리는 크다. 근데 내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