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 해요'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제가 다 해요'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제가 다 해요”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또 그 말이 나왔다

오늘 외주 디자이너 민지씨한테 또 그랬다.

“이 부분 제가 다시 해볼게요.”

민지씨가 보낸 배너 시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좋았다. 근데 뭔가 내가 원하는 게 정확히 이게 아니었다. 설명을 못 한 건 나인데.

“괜찮은데요? 제가 수정할게요.”

민지씨는 익숙한 듯 답했다. 이미 몇 번째인지 안다는 투.

결국 그 배너, 내가 캔바 켜서 2시간 만졌다. 민지씨 시안 80% 쓰면서 20%를 내가 고친 건데, 그냥 처음부터 내가 할 걸 그랬나 싶었다.

고객한테도 마찬가지다

어제 고객사 대표님이 물었다.

“이 기능, 개발사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가 따로 맡길게요.”

그 순간 또 나왔다.

“아뇨, 제가 할게요. 어렵지 않아요.”

사실 어렵다. 예약 연동 API 새로 붙이는 건데 최소 3일은 걸린다. 근데 외부 개발사 붙이면 소통 비용이 더 든다. 설명하고, 확인하고, 수정 요청하고.

그럴 시간에 내가 하는 게 빠르다. 그렇게 믿는다.

결과? 주말 이틀 통으로 코딩했다. 남자친구랑 약속 취소했다. “미안, 급한 작업 생겼어.”

“또?”

전화 끊고 노트북 켰다.

완벽주의의 함정

왜 이럴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남한테 맡기면 불안하다. 내 기준에 안 맞을까봐. 고객이 실망할까봐. 우리 서비스 퀄리티가 떨어질까봐.

결국 완벽주의다.

120개 고객사. 전부 내가 직접 온보딩했다. CS도 전부 내가 답했다. 새벽 2시에 온 문의도 아침 7시에 답장 보냈다. “빠른 답변 감사합니다” 받으면 뿌듯했다.

근데 요즘은 그게 무섭다.

이 속도로 가면 언제 터질지 모른다. 아니, 이미 터지고 있다. 번아웃 조짐. 아침에 일어나기 싫다. 노트북 보기 싫다. 고객 문의 알림 오면 한숨부터 나온다.

트위터에 이런 글 올렸다.

“‘제가 다 해요’ 병 걸린 사람 나만?”

댓글 12개 달렸다. 전부 공감. 솔로프리너들 다 비슷한가보다.

컨트롤하고 싶은 거다

근본 이유를 찾았다.

나는 통제하고 싶은 거다. 모든 걸 내 손 안에 두고 싶은 거다.

외주 디자이너한테 맡기면? 결과물이 내 통제 밖이다. 개발 외주 주면? 일정이 내 통제 밖이다. 직원 뽑으면? 업무 퀄리티가 내 통제 밖이다.

그래서 전부 내가 한다. 개발도, 디자인도, 마케팅도, CS도.

MRR 350만원. 혼자 만든 수치다. 자랑스럽다. 근데 여기가 한계다.

어제 노션에 적었다.

“현재 상태로는 MRR 500만원이 천장이다. 혼자서는 더 못 간다.”

인정하기 싫었다. 근데 사실이다.

하루 18시간 일해도 24시간은 안 된다. 팔이 네 개 달려도 여덟 개는 안 된다.

위임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빨리 가려면 혼자, 멀리 가려면 함께.’

맨날 인용하면서 실천은 안 했다.

이번주 목표 세웠다. 작게 시작한다.

첫째, 민지씨한테 디자인 가이드 문서 만들어주기. 내 기준을 명확히 적는다. “이런 톤, 이런 컬러, 이런 레이아웃.” 그럼 수정 요청 줄어든다.

둘째, CS 템플릿 만들기. 자주 오는 질문 10개. 답변 형식 정리. 나중에 누가 와도 쓸 수 있게.

셋째, 개발 외주 한 번 시도. 작은 기능 하나. 내가 PM 역할. 통제를 완전히 놓는 게 아니라 방식을 바꾸는 거다.

넷째, “제가 다 해요” 대신 “검토해볼게요” 말하기. 미묘한 차이지만 중요하다.

혼자 가는 게 빠른 건 맞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확신은 없다.

남한테 맡기는 게 정말 나을까? 직접 하는 게 더 빠른데? 퀄리티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근데 이것만은 안다.

지금 방식으로는 못 간다. 2년차까지는 됐다. 3년차는 다르게 가야 한다.

완벽주의 내려놓기. 쉽지 않다. 20년 넘게 붙어있던 습관이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오늘부터다. 민지씨한테 메시지 보냈다.

“다음 작업, 시안 나오면 제가 피드백 한 번만 드릴게요. 그거로 최종 확정할게요. 수정은 민지씨가.”

답장 왔다. “오… 드디어요? ㅋㅋㅋ 알겠습니다!”

웃픈 반응이다.

노트북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도 또 “제가 다 해요” 나오겠지. 천천히 고친다.

MRR 500만원 넘으려면 바꿔야 한다. 혼자 가는 방식을.


완벽주의는 성장의 적이다. 천천히 내려놓는 중이다.